Section 1.
소년 노회찬, 세상 속으로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부모님 밑에서 1녀 2남의 맏아들로 태어난 노회찬(1956.8.31.)은 부산 초량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린 시절 그는 초량동 산동네에서 친구들과 많은 추억을 만든다. 한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매우 개구쟁이였을 것 같은데 어떠했나?’는 질문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

“어렸을 때 썼던 일기책을 아직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중에 ‘오늘은 잠이 안 온다. 엄마한테 한 대도 안 맞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일동 웃음). 그렇게 하루라도 엄마한테 맞지 않으면 잠이 안 오는 아이였다. 또 작은 수첩이 있었는데 학교가면 담임선생님께 도장을 받아와야 했고, 집에 오면 엄마한테 도장을 받아야 하는 수첩이었다. 그 수첩이 무엇이었느냐면 내가 사고를 안치면 도장을 받을 수 있는 수첩이었다. 집에 수첩을 가져와 선생님 도장이 안 찍혀 있으면 엄마한테 야단을 맞는 것이고, 학교 가서 수첩에 도장이 안 찍혀 있으면 동네에서 사고를 친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았다. 그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웃음). 그래도 어린 시절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때 산동네에 살며 산에서 뛰어 자란 것이 가장 큰 자산이다. 어린 시절 이러한 경험은 자연과 가족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1-1 구봉산을 뛰어다니던 소년

특히 구봉산 장군암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 때면 친구들과 늘 찾았던 곳으로 초등학교 시절 어린 노회찬의 일기장에 자주 등장한다. 버찌를 따먹다 스님에게 들켜 혼난 곳도 장군암이 었다. 후일 노회찬은 “학교 가듯 장군암에서 놀았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오늘 아침 7시에 일어나 동생과 함께 등산을 갔다. 오전 7시인데도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나는 동생과 함께 장군암절까지 올라갔다. … 나는 다음부터 일요일마다 등산가야지 하고 작정했다. (1969년 1월 5일 일기)

오후에 동무와 함께 산에 갔다. 원래 오늘 아버지, 동생과 함께 낚시질 하러 가기로 했 는데 텔레비전의 엉터리 일기예보(오늘 비가 온다고 했다) 때문에 날씨가 걱정되어서 가지 않았는데 비는 커녕 구름도 없는 하늘이 되고 마니 아깝기만 했다.
그래서 집에 있기가 심심해서 동무와 함께 산에 올랐다. 목적지는 ‘장군암’으로 하고 올랐다. 나의 동무는 몸이 비대해서 그런지 조금만 올라가서도 헉헉 거리고 좀 쉬고 또 오르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나 별로 재미있는 것이 없어서 그 가까이에 있는 연못에 갔다. 이 연못은 저번 ‘사라호’ 태풍이 불 때만 해도 팔목만한 고기들이 많았고 내 몸보다 큰 물뱀도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산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이 연못의 바닥은 차차 높아져서 개구리, 미꾸라지밖에 살지 못했다. 그런데 작년에 와보니 그 흔하던 개구리까지 멸종되어 가고 있었다. 정말 말세로다! (1970년 6월 21일 일기)

#1-2 호기심 많던 소년

이젠 4학년이니 한문 공부를 하라는 누나 말을 듣고 쓰기 시작했다. 약 30분쯤 쓰고 나니 팔이 아프고 지루해서 쓰기 싫어졌다. 나는 “한글도 좋은 글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한문을 쓰는가?” 나는 이상하게만 여겨진다. (1966년 3월 22일 일기)
(※ 일기장 밑 선생님의 답글: 회찬이 말이 맞았습니다. 머잖아 우리 한글만 사용하게 될 것 같지만 아직은 높은 학교에 가서 좋은 책을 읽으려면 한문을 알아둬야 합니다.)

신문을 보니 내일 백마부대가 월남에 간다고 적혀 있었다. 지금도 월남전선에는 자유의 투사들이 싸우고 있다. 맹호와 청룡 등이 한국의 이름을 떨치고 이번에는 백마가 가서 한국을 자랑한다. ( 1966년 8월 27일 일기)

외삼촌께서 21개의 꽃을 만드는 장난감을 가지고 오셨다. 하나의 장난감으로 21개의 꽃을 만든다는 것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해바라기, 다알리아, 호박꽃, 살비아, 민들레 등이 여러 꽃을 만드는 것을 나에게 주셨다. 좋은 선물이었다. (1967년 1월 19일 일기)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간첩들이 서울에 침입해서 행패를 부리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생명을 잃게 하였다. 이 간첩들은 지난 22일 밤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모두 31명 북한에서 2년 산속에서 3개월 간 서울 지리를 훈련받았다고 한다. (1968년 1월 23일 일기)

오늘 저녁은 채널 5번 KBS 서울중앙 TV방송이 나온다 해서 다이얼을 5번으로 돌렸다. 화면에는 중앙정보기관의 사람과 자수한 간첩 김신주(-> 김신조: 작성자)와의 대화가 있었다.(1968년 1월 27일 일기)

#1-3 독서와 영화 관람을 즐기던 소년

“평화인은 나중에 좀 철들어서 깨닫게 된 개념이고 지향인데, 자유인과 문화인은 부산 시대에 형성된 것 아닌가 싶어요.” 노회찬이 한 말이다.
훗날 ‘문화인 노회찬’을 형성시킨 부산시대의 ‘문화 소년 노회찬’. 그는 책 읽기와 영화 보기를 즐기는 소년이었다. 그의 일기 내용을 추려보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위인의 소년시대란 책을 읽었다. 나는 본래 이런 책을 좋아한다.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했는가? 까닭을 알고 싶다. (1966년 3월 23일 일기)
(※ 일기장 밑 선생님의 답글: 좋은 책을 많이 읽으니까 그렇게 착한 사람인가 봐요.)

안데르센 동화집1을 읽었다. 가장 우스웠던 이야기는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 그 임금님은 사기꾼 꾀에 속아서 벌거벗고 행진을 하면서도 “새삼스러이 행렬을 중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독서 감상문에 쓰겠다.(1966년 7월 29일 일기)

새소년 9월호를 읽었다. 김기수의 일생도 보고. 눈보라 꽃보라 밤하늘에 별이 총총 등을 보았다. 그리고 이 책을 동무들에게 빌려주겠다. (1966년 8월 17일 일기)

아버지께서 사오신 “그림동화집”을 읽었다.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동화는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못된 계모 밑에서 일 하다가 도망쳐 나와 숲속에 가는 이상한 집이 있었다. 그 집은 유리창은 사탕, 지붕은 엿, 기둥은 과자 방바닥은 껌이었다. 그래서 헨젤과 그레텔은 그 집에서 재미있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참 재미있었다. (1967년 1월 6일 일기)

오늘 집에 있는 “그림동화집”을 모두 다 읽었다. 내가 방학 동안에 “도이치 동화집” “아라비안 나이트” “그림동화집”을 한 권에 약 300 페이지나 되는 동화집을 3권이나 읽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책을 많이 읽겠다. (1967년 1월 11일 일기)

아버지, 동생과 함께 “중앙극장”에 구경갔다.
영화 제목은 “황야의 무법자”이다. 대서부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나쁜 악당들을 죽이곤 하였다. 악당 40명과 자기 혼자서 싸울 땐 참 통쾌했다. (1967년 1월 22일 일기)

누나, 누나 친구, 동생과 함께 문화극장에 구경갔다. 제목은 “홍길동”. 홍길동은 모든 어려움 참고 백운도사에게 무술을 배워 활빈당과 힘을 합치어 나쁜 사또를 죽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구한 한국 최초의 만화 영화이다. 참 재미있었다. (1967년 1월 27일 일기)

오늘은 동생과 나는 아버지를 따라 시내에 갔다. 먼저 나의 실험기구를 사고 다음엔 백화점에 가서 동생과 나의 내의를 샀다. 아버지께서는 먼저 가시고 나와 동생은 국제극장에서 손오공이라는 만화영화를 봤다. (1968년 1월 2일 일기)

양력설!
오후에 아버지, 동생, 나는 중앙극장에 영화 보러 갔다. 제목은 <대장군>이란 영화였다. 그런데 극장 내에서 영화상영 도중에 영화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명문당 서점에 들려 이 일기책을 샀다. 이 일기책을 사려하니까 서점주인이 “자네도 일기 쓰나? 허! 일기가 놀라겠는데” 하셨다. 아뭏든 나는 이 일기에 하루하루를 빠지지 않고 기록하겠다. (1969년 1월 1일 (수) 일기)

오늘 누나가 누나 친구에게서 빌려온 학원 명작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란 책을 보았다. 주로 4.19혁명 때의 일로 가난한 아이의 즉 고아의 꿋꿋한 자치정신과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심. 좀 두꺼운 책이었지만 저녁밥을 먹은 후 자기 직전까지 다 읽었다. 참 기분이 좋았다. (1969 년 1월 7일 일기)

오늘 누나와 함께 국제극장에서 ‘의사 지바고’란 영화를 보았다. 왜 그런지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누나가 상영시간이 4시간이라던데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수첩에도 오늘 본 영화의 제목과 날짜를 기록했다. 그러고 보니 입학시험 친 후에 본 영화가 7개였다. (1969년 1월 10일 일기)

오후에는 동생과 함께 중앙극장에 “심야의 결투”란 영화를 보러갔다. 중국 무술영화였다. 매우 재미있었다. (1969년 1월 12일 일기)

오래간만에 일기를 쓴다.
막상 쓰려 하니 잘 써지지 않는다. 나는 어제 어머님께 말씀도 드리지 않고 동명극장에 영화 보러갔다. 제목은 ‘007 선더볼 작전’. 보고 와서 어머님께 꾸중 들었다.(1969년 2월 24일 일기)

지루한 시험도 끝났다. 2시 50분부터 학교에서 동명극장의 ‘알프스의 영웅들’이란 영화를 보러간다고 한다. 재미있을 것 같지가 않다. 나는 부영극장의 ‘마켄나의 황금’이란 영화를 보러 갔다. 정말 재미있었다. 웅대한 사막과 계곡 그 사이를 건맨들이 황금에 미쳐 동지까지 죽이면서 황금을 찾으려 한다. 이 영화는 자연적인 배경이 너무 멋있었다. (1970년 7월 19일 일기)

고입 대성학원(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위치) 입학시험을 봄. 시험을 치른 뒤 극장 단성사에서 ‘목격자’(Eyewitness)라는 영화를 혼자 봄 (1972년 2월 13일)

#1-4 장래희망은 발명가나 생물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1970, 1980년대엔 대통령과 과학자, 1990년대는 의사와 판·검사. 국민(초등)학 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손꼽혔던 인기 직업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부모의 기대와 언론의 영향을 받는다.
부산 초량국민학교(1963년 3월~1969년 2월) 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의 희망’란이 없다.
몇몇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어린 시절 꿈을 어머니께서 생일 선물로 사주신 <재미있는 발명 발견 이야기>와 <원색자연학습도감> 등 책을 통해 키운 발명가, 생물 계통의 일, 어부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를 펴낸 뒤 문화웹진 <채널예스>의 손민규(인문MD)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정치를 안 했다면,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노회찬의 대답은 이러했다.
“하고 싶은 일이야 많았죠. 그래서 뭘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물을 참 좋아했어요. 생물반도 하고, 채집하고 분류하는 걸 좋아했어요. 좋아하는 책 분야 중 하나가 식물과 동물 생태를 연구해서 인간 생활 사회에 접목시키는 것인데요. 생물을 미세하게 관찰해서 그것에서 원리나 습관을 읽어내고 우리 인간 살아가는 방식과 연결하는 책을 즐겨 읽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했을 수도 있죠. 아니라면, 부산 출신이니 좋 아하는 바다에서 좋아하는 고기를 잡으며 어부가 되어서 열심히 건강하게 살 수도 있었겠죠.”

2017년 4월의 한 인터뷰(이혜정, <국회의원의 서재> 정의당 노회찬 의원: 자연, 사색, 행 복: 책이 선물한 것들)에는 관련된 노회찬의 추억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어린 시절 읽은 책을 청년이 될 때까지 계속 펼쳐봤을 만큼, 제게는 그 자연도감이 더없이 소중했습니다. 책을 통해 만난 자연에 깊이 매료되면서,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기 도 했고요. 덕분에 야생동물의 세계를 실감 나게 그린 <시튼 동물기>와 세밀한 관찰력으로 곤충의 세계를 소개해준 <파브르 곤충기>까지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특히 <파브르 곤충기>는 성인이 되고 완역본을 다시 구매했을 정도로 아주 멋진 책이었죠.“

발명가가 되고 싶었다는 꿈은 어릴 적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재미있는 발명 발견 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내 생일을 잊으신) 어머니는 ‘미안하다’면서 저를 데리고 1km를 걸어서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책방에 가서 사준 책이 <재미있는 발명 발견 이야기>였다. 그 책 한권이 저를 6년간 머리를 지배했다. ‘나도 발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책은 안가지고 있는데 <원색 자연학습도감>은 지금도 갖고 있다. 동물과 곤충을 원색칼라로 그린 책이었다. 그 책 때문에 전문적인 생물채집과 분류학을 배웠다. 그것을 배워서 한 달씩 생물을 채집하러 나갔다. (…) 어린 나이에 자연을 굉장히 좋아했다. 지금 나이 들어서 시골이 어떻고, 전원이 어떻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집이 산비탈에 있는 산동네의 마지막 동네였기 때문에 놀 수 있는 데가 산밖에 없었다. 늘 산에서 뛰어다녔다. 그것이 건강에도 굉장히 좋았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에 애착이 갔다. 웬만한 것은 거의 다 집으로 가져와 계속 키웠다. 그런 것들을 굉장히 좋아해서 중학교에 와서도 생물반에서 활동했다. 제가 이런 쪽으로 안 왔으면 그쪽 계통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구영식, <진보의 자격>, 2013 인터뷰 내용>

노회찬의 어머님은 책에 여덟살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를 써주시기도 했다.

#2 중학생 노회찬의 꿈은 슈바이처

구봉산 장군암을 오르내르며 뛰어놀고 동물과 식물에 관심이 많던 소년 노회찬은 중학생이 되면서는 슈바이처와 같이 아프리카 같은 오지에서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등 봉사활동 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부산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1, 2, 3학년 ‘학생의 희망’란에 의사라고 적혀 있다.

“방학 때면 식물·곤충이 좋아 한 달 내내 채집하고 표본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시간이 날 때면 부산 앞바다를 보면서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생각했다. 바다 끝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하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것처럼. 어린 눈에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돕는 슈바이처가 멋있어 보여 의사가 된다고 했다. 부모님은 내심 의사 아들을 두나 싶어 기대가 컸다.” (임지은(월간중앙 기자), 「[인물탐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 – 노동자들의 슈바이처, 그 사랑의 줏대」, <월간중앙> 2004년 10월호)

2005년 3월 3일 <오마이뉴스>와 함께 ‘노회찬, 네티즌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의정간담회를 개최(국회의원이 인터넷을 통해 의정간담회를 여는 것은 이것이 처음), ‘소년시절, 청소년기의 꿈은 뭔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슈바이처 같은 분을 굉장히 존경했다. 희생적으로 돕는 것도 대단해 보이고 아프리카 간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노회찬 “내 토론 맞상대는 유시민과 홍준표”」, <오마이뉴스>, 2005년 3월 3일)

2007년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는 대선 경선후보의 ‘50문 50답’을 싣는다(329호, 2007.6.25.-7.1.). 28번 ‘어린 시절 꿈’에는 “슈바이처같이 오지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의사”로 적혀 있다. (참고로 29번 문항 ‘직업을 바꾼다면’ 물음에는 “요리사나 작곡가.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어서”로 답하고 있다.)

#3 세상 속으로: “전쟁을 경험한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발명가, 생물계통의 일, 고기잡는 어부,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 등 소년 노회찬의 ‘소박한’ 꿈은 서울에서 1972년 10월유신 선포와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경험하면서 ‘고교생 반독재 민주운동가’로 바뀌게 된다.

김어준과의 대화에서 노회찬은 부산고를 낙방하고 재수하기 위해 서울에 온 것을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김어준, 노회찬과의 대화: 회찬 씨, 농담도 잘하셔」,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43쪽)
– 노회찬: “72년도에 서울에 왔죠. 그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아마 부산에 있었으면 이 길에 안 들어섰겠죠. 부산에 있었으면 반항심은 극대화되었을 거 같구, 친구들과 어울려서 이상한 길로 빠졌을 가능성도 매우 높아요.”
– 김어준: 인문학적 소양 있는 지방건달, 하하하하.
– 노회찬: 서울로 오면서 철이 든 거지. 나 혼자다 보니까, 친구들도 처음엔 없었을 거 아니에요. 재수하는 처지에 친구 사귀고 돌아다닐 처지도 아니고. 그러다보니까 사회를 보기 시작한 거예요.

서울에서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는 소위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 대통령’의 길을 연다. 이건 분명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노회찬을 분개시킨 것은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점이었다.(<P&P 정치뉴스>와의 인터뷰, 1995.11.3.).

“어떤 의미에서 나는 새 정치인이 아니다. 고입 재수생이었던 1972년 10월 17일 오후 5시 귀가하던 버스 안에서 라디오 뉴스로 국회가 해산되고 유신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원내각제와는 달리 대통령제 하에선 국회를 해산할 수 없다는 것은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잘 기억하고 있던 교과서 내용이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으로 달려가 교과서를 펴고 확인하였으나 나의 기억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면 라디오 뉴스가 잘못된 것인가? 다시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시청 건너편의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는 탱크가 버티고 서 있었으며 중앙청 앞에는 장갑차 두 대와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라던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이미 교과서를 믿고 어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 다음날부터 소년의 시야에는 들어올 수 없는 사회와 정치가, 그 뒷면의 비리와 불의가, 이에 대항하는 투쟁과 양심의 목소리들이 눈에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리>지 같은 걸 보면서 아, 세상이 이렇구나, 부모나 교과서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고 굉장히 호기심이 생기는 거야. … 청계천에 가서 그 당시 폐간된 직후였는데 <사상계>를 샀죠. 한 권에 15원 짜리도 있고 그런 걸 한 권씩 두 권씩 사다 보니까 3분의 2는 이해 못할 내용이고, 3분의 1인 이해가 되는데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있는 거예요. 거기에 빠지기 시작했던 거죠.”(<진보의 재탄생> 45쪽)

“유신이 일어난 날, 그 날이 내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110쪽)

#4 첼로 켜는 학생운동가

유신 이후 교과서 밖 세상으로 나온 노회찬은 1973년 경기고 입학 후 마음 맞는 친구들과 모여 ‘세상’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던 서양사상의 지적 항해와 함께, 함석헌·박현채·김지하 등 ‘문제어른’들의 생각도 접하고 강연도 쫓아다녔다.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등 고민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노회찬과 친구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보내며, 책에서 길을 찾고 앞선 사람들에게서 답을 얻기 위해 애썼다. 이들의 아지트는 주로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중국집 ‘영춘관’ 2층과 ‘부산촌놈’ 노회찬이 거주하던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 외삼촌 집이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경기고 1학년 때인 1973년 노회찬은 정광필·이종걸 등 마음을 나누던 친구들과 독재에 대한 분노를 공유했다. 그런 가운데 11월이 되자 노회찬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흔쾌히 동의한 정광필과 함께 노회찬은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로 시작되는 유인물(‘귀 있는 자 들으라’)을 1200장 정도 등사해 새벽 어둠을 틈타 교실에 몰래 들어가 책상 속에 넣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었다.

2학년 때인 1974년 4월에는 유신반대 학내 시사 토론회를 열고, 수업 거부와 농성을 주도하며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유인물 살포를 함께 한 정광필(50+인생학교 학장), 45년 지기인 그는 고교시절 노회찬과 함께 한 시간들을 이렇게 떠올린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얘기부터 한 자락 시작하자. 가장 많이 떠오르는 장면은 시험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가던,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영춘관’ 2층 방이다. 그곳에서 군만두를 안주 삼아 고량주를 꽤 마셨다. 그리고 이어지던 시국 얘기며 철학과 문화·예술에 관한 토론들. 헤어지기 아쉬워 2차로 몰려간 곳은 노회찬의 자취집. 밤새워 마시고 토론하고 음악을 들었다.

시험 때마다 치러진 이 의례는 노회찬의 제안으로 서양사상사의 탐색으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던 지적 항해는 중세로 접어들면서 좌초했지만 대학 시절 탐구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매일경제>, 2019.7.26.)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서울 화동의 경기고등학교 교정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는 이종걸(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0대 소년들이 청춘을 즐기기에는 10월유신으로 그 폭압성을 더해가던 박정희 철권통치가 너무나 분노스러웠다. 우리는 <창작과 비평>도 읽고 함석헌, 백기완 선생의 강연도 다녔다. 노회찬과 함께 퇴학 조치를 불사하고 유인물도 돌리고 데모도 했다. 그러면서 형성됐던 가치관과 사회관이 우리의 평생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격히 얘기하면 같이 한 것이 아니라, 노회찬 친구가 주도하고, 만든 것에 제가 따라갔던 친구였기 때문에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인이 다 기획하고 한 것에 대해 함께 했던 기억에서 당당하고, 어린 소년 시절에도 지금 보이는 모습들이 남아있다.” (<세계일보>, 2018.7.26.)

그런가하면 노회찬은 꾸준히 첼로 레슨을 받고 곡을 쓰기도 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노회찬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자녀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곤 했던 노회찬의 부모님은 문화와 예술을 중시했던 분들이고, 노회찬은 그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 그 기록은 꾸준히 써온 그의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1967년 1월 7일 일기장 (초량초등학교 4학년)
오늘은 어머니께서 기쁜 이야기를 했다.
내가 목소리가 나빠서 노래를 잘 못 부르니 바이올린을 켜라는 것이다. 저녁에 오신 아버지께 어머니께서 여쭈어보니 아버지께서도 무슨 악기든지 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아직 사지도 않았지만 나는 퍽 기뻤다.

※ 1969년 12월 19일 (부산중학교 1학년)
바야흐로 1969년도 이제 끝나고 1970년이 다가온다.
1969년 1월 1일부터 시작한 이 일기…. 1달 10일 정도만 썼다. 반성할 일이다. 내가 1학년의 성적이 1등, 3등, 2등, 1등, 4등, 6등, 2등…. 이렇게 된 것을 내가 이 일기를 얼마만큼 쓰는가?가 알려주는 듯하다. 나도 이젠 학년말 시험 땐 전교 등위에도 올라야겠다. 1학년을 우등으로 마쳐야겠다.
방학 때에는 주산5급 따기, 서예 연습, 펜글씨 연습, 그림 그리기, 첼로, 수학 그리고 2학년 예습 할 것이 참 많다.
내일 20일부터 계획을 짜서 하루하루 꼬박꼬박 열심히 공부하겠다! 맹세한다!

※ 1969년 12월 24일 일기장 (부산중학교 1학년)
지금은 크리스마스이브다. 오늘 학교서 종업식을 마치고 돌아와서 친구들과 약속한 영화를 보려고 했으나 어머님께서 허락해주시지 않아서 못갔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첼로 선 생님 댁에 lesson 받으러 갈 때 케익을 선물로 드렸다.

※ 1970년 5월 8일 일기장 (부산중학교 2학년) 오늘 특별활동 시간에 내가 첼로를 켰다. 그런데, 학교에 있는 첼로는 보기 위해서 있는 것이므로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아무 곡이나 하라고 하셔서 베토벤 미뉴에트를 켰다. 다음부터는 악보를 가지고 가야겠다.

※ 1970년 6월 14일 일기장 (부산중학교 2학년)
어저께 일본에서 사온 첼로로 켜보았다. 정말 소리가 국산악기완 다르게 멋지다.
내 키보다 작은 이 나무통이 20만원이라….
값이 비싼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아버님께 20만원을 빌려서 산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커서 돈을 벌면 아버님께 20만원을 갚아드려야 한다. 아니다. 20만원은 너무 작다. 200만원 2000만원 2억원 …. 이 세상의 돈 전부라도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이 은혜를 갚기 위해 음악가는 되지 않더라도 정말 멋지게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 1970년 6월 15일 일기장 (부산중학교 2학년)
오늘 첼로 선생님께 정말 따끔한 꾸중을 들었다. ‘폭이 넓은 것보단 폭이 좁더라도 깊은 것이 낫다.’ 정말 나는 너무 여러 가지를 해왔다. 첼로, 펜싱, 작곡, 독서, 축구, 실험실습, 공작, 그림…. 그러나 내가 뚜렷하게 피어날 만큼 잘 하는 것이 무엇인가? 정말 반성해야 할 점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아버님께서도 비싼 첼로도 사주시고 했으니까 다른 것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첼로만큼은 열심히 하겠다고.

※ 1970년 6월 24일 일기장 (부산중학교 2학년)
오늘은 매우 기분이 좋다. 첼로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다. 소나타와 Lee는 보통 때는 아무리 연습해도 선생님 댁의 연습용인 무스탕 cello에는 통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스즈키 첼로를 줄 맞추려고 가져가서 그것으로 연습했다. 상당히 잘 되었다. 선생님께서 그 악장은 아주 좋고 1악장은 뒤에 tempo가 좀 빠른 것만 연습하면 완전무결하다고 한다.

※ 1970년 7월 3일 일기장 (부산중학교 2학년)
오늘 학교의 특별활동시간에 나는 첼로를 켰다. 이때까지 해온 건반악기는 마치고 오늘부터는 현악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음악기악반 중에서 현악기를 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세 가지를 가르쳤다. 첼로는 자신이 있어도 바이올린 비올라는 자신이 없었다. 첼로는 Minute in G를 켰다.

서울에 올라와 거침없이 세상을 배워가던 그 때에도 첼로는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였다. 개교기념일에 독주를 하기도 했고 고2때에는 이화여고 축제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화여고 갈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 강당 가서 또 연주하고. 연주하고 나니까 3천원 받았나? 옆에 이딸리아노 인가 하는 음식점이 있었어요. 교문 옆에. 저녁 때 대접받고. 최고의 그거였지. 최고의.”

고교 2학년 때는 서정주의 시 석남꽃에 곡을 붙인 石南花(소연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상금 타면 10% 주겠음’ 이라는 메모가 깨알같이 유머러스하다. 정의로운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유신이라고 하는 시대 속 부정의에 대항하던 학생운동가라면 비장하고 꼿꼿할 것만 같다는 우리의 예상을 뒤집어버린다.
첼로에 대한 애정에 비해 연주 실력은 별로였다는 것조차도.